익선동 나들이를 다녀왔다. 그동안은 그냥 핫플레이스란 이유로 놀러 다녔고, '게이가 많다',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들이 많다' 등 다양한 악담으로 알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양한 역사가 담긴 곳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3곳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요 포인트들을 방문해보며 그 공간에서 있었던 시간을 느껴보고자 했다.
0.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
익선동 부근은 낙원동 166번지로 불리운다. 단일 번지로는 굉장히 큰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곳이 원래 철종의 형이 살았던 누동궁이였기 때문이다. 철종이 태어난 곳이고 후에 아버지의 사당을 지어 형이 거하도록 한 곳이 바로 이곳 누동궁이였다.
이후 일제시대에 영평군(철종의 형) 4대손인 이해승에게 정세권이 세운 건양사라는 회사가 사들여 한옥 마을을 조성하게 된다.
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회의 후원자이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한 독립운동의 조력자였으며, 한국 최초의 부동산업자이기도 했다. 그는 구한옥들을 구매하여 서민들을 위한 작은 한옥들로 개조하여 분양해왔다. 그가 만든 한옥 마을이 익선동 166번지, 즉 누동궁 자리와 북촌 가회동이다.
이 주변을 살펴보기 위한 첫 지하철역 출구는 여러 선택이 가능하다. 5호선 종로3가역, 1호선 종로 3가역, 3호선 안국역 등..
이번에 내가 고른 코스는 [5호선 종로 3가역 5번 출구 -> 락희 거리 끝 유진식당 -> 탑골공원 -> 낙원상가 -> 낙원 아파트 -> 이비스 앰배서더 호텔(오진암 터) -> 익선동 한옥거리 내 중정식 한옥 두 채 -> 카페 뜰안 -> 고려시대 길과 조선시대 피맛길을 가르는 고깃집 미 -> 게이의 길 -> 쪽방촌 -> 춘원당 한약방]이다.
1. 종로3가역(5호선) 5번 출구
5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것은 낙원 상가이다. 우선 너무 배가 고프므로 이 지역 테마거리인 락희 거리로 향한다. 이곳에는 2000원 해장국집, 순댓국집 등 다양한 먹을 것이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냉면 맛집인 유진식당이다.
들어가서 한 그릇 시켜보았다. 정갈하지만 진한 국물 맛과 중면 크기의 탱탱한 면까지 왜 맛집이란 이름으로 유명한지 알겠다. 다음에는 한 명 더 데리고 와서 수육과 함께 소주도 먹겠다고 다짐하며 본격적인 산책을 시작한다.
우선 탑골 공원을 들려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한번 보고 :-)
2. 탑골공원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석탑 주변은 약간 타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탑골공원 남쪽 벽을 허물고 만든 파고다 아케이드라는 상가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악기점들이 많이 있었는데 아케이드가 철거되면서 이들은 낙원 상가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이 지역 테마 골목길들
락희 거리를 들어온 김에 이 지역에 있는 테마 골목길들을 확인해보자. 이 지역에는 여러 테마 골목길들이 있다.
1) 락희 거리, 송해길
Lucky와 발음이 비슷한 락희(樂喜)거리는 약 100미터의 짧은 길이다.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과 글씨체로 탑골공원, 실버 영화관을 찾는 노년층에게 편안함을 즐기도록 조성되어 있다. 서울시는 일본 도쿄의 대표 노인 거리인 '스가모 거리'처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리의 끝 편 탑골공원에는 많은 테이블들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담소(담주?)를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번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향하지 않고 왼쪽으로 가다 보면 송해길을 만날 수 있다. 전국 노래자랑으로 유명한 송해 아저씨의 이름을 딴 길로 락희 거리와 마찬가지로 노년층을 위한 길이다. 옛 DJ들이 있을 것 같은 가게들도 종종 보여 발걸음을 멈추게 하곤 했다.
2) 순댓국 거리
락희 거리의 바로 옆길, 낙원상가의 바로 옆길인 순댓국 거리. 락희거리 초입부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순댓국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광주 집, 순천 집 등 다양한 순댓국집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소주 한잔 하러 들어가 보는 걸로!
3) 아귀찜 거리
락희 거리, 순댓국 거리의 건너편 길을 바라보면 마산 아귀찜 등 아구찜 집이 많이 보여 아귀찜 거리로 불린다. 이 부근 산책이 끝나면 저 길 끝에 있는 골목을 통해 옛 오진암 터인 이비스 호텔을 가보기로 한다.
4) 갈매기 고기길, 그리고...
지도의 오른쪽 끝에 표시된 곳은 고깃집이 많아 삼겹살 골목, 고기 골목 등으로 불린다. 이 골목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해왔던 골목, 조선시대의 피맛길이었던 골목이기에 찾아볼 만하다. 또한 조선시대 피맛골 목은 게이의 길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성적 소수자들이 찾는 술집이 많은 곳이다.
4. 낙원 상가, 허리우드 클래식
낙원상가는 낙원 악기상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만 살펴보면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지하에 커다랗고 넓고 뭔가 색다른 시장, 1층은 몇 개의 악기 가게, 낙원빌딍 입구, 그리고 자동차 도로, 2~4층까지는 악기 상가, 그리고 4층에는 옛 허리우드 클래식/지금은 노년층을 위한 영화관인 실버영화관, 그리고 그 위로는 낙원 아파트(빌딍)이 있다.
악기에 별 관심이 없어 잘 모르지만 이곳 악기상가에는 최신 기계에서부터 옛 희귀 템까지 존재한다고 한다. 원래 이 주변 술집에서 연주하던 악사분들 때문에 생겨난 곳이지만 노래방이 발달하면서 쇠퇴하다가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악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찾아봐야 할 곳.
지하의 시장은 아쉽게도 쉬는 날인지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이곳은 주변 음식점들이 재료를 사는 곳이라서 생각보다 크다고 한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가 좀 무섭고, 내부는 다듬어지지 않고 콘크리트 벽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좀 그로테스크한 느낌이라고 한다.
이곳은 이훈민 씨가 '빅이슈'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일제시대에는 원래 소개 공지였다고 한다.
소개공지는 전쟁 때 공습으로 인해 생긴 화재가 번지지 못하게 공터로 놓아두는 곳으로, 6.25 이후 이 공터에 이재들이 모여들어 판자촌을 이루었고 그러다 보니 시장, 술집이 생겨났다. 1967년에 서울시가 필로티 공법을 이용해 1층을 도로가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든 현재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근처의 세운상가도 같은 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재밌는 것은 설계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낙원상가의 4층에는 허리우드 클래식이라는 극장이 있었다. 허리우드 클래식은 이후 서울 아트 시네마로 바뀌어 예술 영화를 상영하다 현재는 노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인 실버 영화관이 위치해있다. 4층에는 옥상 같은 공터가 쉼터로 마련되어 있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쉴 수 있다(담배도). 그리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실버 영화관과 낭만극장 입구가 있고,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신다.
5. 낙원 아파트(낙원빌딍)
다시 1층으로 내려가 순댓국 거리 쪽에서 바라보면 '낙원쁼딍'이라는 현판이 붙은 입구가 보인다. 입주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엘리베이터를 이용하 14층으로 이동해 보았다.
낙원 아파트는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 있다.
1) 우선 아파트가 ㅁ자형 구조이다.
내부 중앙이 비어있으며 천장이 오픈형으로 빛을 받을 수 있다(슬레이트로 막혀있긴 하다). 충정아파트, 동대문 아파트, 세운 상가 등 오래된 아파트들이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2) 낙원아파트는 원래 8층까지로 설계되어 있었다.
원래 낙원아파트는 5층까지 상가, 6~8층까지 아파트로 만들어졌다. 이후 9~15층까지 다시 올린 것이다.
8층까지로 설계되었었기에 8층으로 마감을 하고 이후 서례를 변경하여 올린 것이기에 8~9층 사이에는 바닥이 있다. 위에서 보는 사진은 9층 바닥에서 찍은 사진이다.
3) 이 건물은 재밌게도 6층에 옥상 같은 공터가 있다.
아마도 5층까지가 상가건물이므로 상가의 옥상이고 6층부터 좁은 크기로 아파트가 올라가기 때문에 만들어진 공터라고 생각된다. 이 공터는 아파트 주민들의 텃밭, 쉼터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건물의 느낌이 강하지만, 요즘 젊은 부부들이 들어와서 리모델링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주변 환경이나 경치, 그리고 아파트 가격대가 좋으니, 나도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6. 오진암터
아파트에서 나와 아귀찜 거리를 지나 낙원 떡집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다보면 옛 오진암터인 이비스 엠베서더 호텔이 보인다.
그 전에 여기에 떡집이 많은 이유는 '원조 낙원 떡집'의 김승모씨 기사에 따르면 원래 궁중 나인들이 1910년 조선이 망하면서 수랏간 나인들이 쫓겨나 떡집을 차린 것이 시발점이라고 한다. 30년 전만해도 15여개의 떡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4곳만 남았다고 한다.
이비스 앰베서더 호텔은 예전에 오진암이 있던 자리이다. 오진암은 이 시절 성북동의 대원각, 삼청각과 더불어 3대 요정으로 불리던 곳으로 요정 정치의 산실이라고 일컬어지던 곳이다.
원래 이병직이라는 사람의 민가였는데 조 모 씨가 집을 사서 요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옥 최초의 상업업소(유흥주점)이였다고 한다. 오진암이라고 불리었던 이유는 집 안에 오동나무가 있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90년대 룸살롱이 나타나면서 요정들이 밀려나고 2010년까지 버티다가 철거되었다고 한다.
미리 알았더라면 2010년 철거 이전에 찾아볼만도 했는데, 난 그땐 오진암에 대해서 들어본적도 없었다...
개인재산이었기에 종로구청은 여기를 보존할 수 없었고 지금은 오진암이 있었다는 작은 흔적만 남아 있어 아쉽다. 철거하면서 몇몇 대문, 기와, 서까래, 기둥 등을 부분적으로 부암동 주민센터 앞의 문화공간 '무계원'을 만들면서 썼다니 흔적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무계원을 찾아봐야할 것 같다.
여기에 요정이 있었다는 흔적은 호텔 주차장에 붙어 있는 오진암에 대한 설명 벽보와 주변의 한복집, 점집에서만 느낄 수 있다.
7. 중정식 한옥
호텔 옆에 있는 세무소 골목을 통과하면 일명 익선동 한옥거리가 나온다.
참고로 이 낙원동 58번지 종로세무소 자리는 대빈궁이 있었던 곳으로, 바로 장희빈을 모신 곳이다. 이후 1913년 경성측후소가 설립되었다가, 1930년대에 경성시내 3대 요정 중 하나인 천향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1963년에 종로세무서가 들어선다.
익선동의 한옥마을은 일제시대 부동산업자인 정세권이 큰 한옥들을 사들여 작은 한옥들로 개조해 사람들에게 분양하며 만들어졌던 한옥마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마을이며 고려시대 남경 시절의 골목길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즉, 이 지역 지하에는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하간 서울에 남아 있는 많은 한옥마을은 정세권이 이때 만들었던 곳이라고 하니 우리는 이분에게 감사해야할 것 같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졌기에 구경보다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몇몇 공간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1) 카페 뜰안
카페 뜰안은 맛있는 전통차를 파는 카페이다. 여러 메뉴들을 먹어봤는데 모두 맛있었고, 내부 분위기나 일하시는 분들의 느낌이 편안해 시끄러운 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2009년에 만들어진 카페로, 그때는 이 지역이 유명하지 않을 때였다니 이 지역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재밋는 일화는 카페를 오픈하고 한달쯤 후 어떤 손님이 서까래의 모습에 반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UN 김정훈이 배우로 데뷔한 한일 합작 영화 '카페 서울'이란다.(아쉽게도 아직 보지 못했다). 카페의 한쪽 구석에 영화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니 구경해볼만 하다.
2) 중당식 한옥
우리나라 전통 한옥은 중정식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운데에 마당이 있고 그 주변을 방과 담이 둘러싼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면적에 비해 방의 면적이 좁아 효율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정세권은 이런 커다란 한옥들을 구입하여 작게 개조해 사람들에게 분양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때 효율적이도록 마당을 중앙에 두는 것이 아닌 마루를 중앙에 두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를 중당식 한옥이라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중당식 한옥은 다락방과 지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익선동에는 이런 정세권의 건축철학이 담긴 건물이 두개가 있다. 모텔 시네마 앞쪽의 두개 건물로 옆에서 보면 지붕 아래 다락방이 있는 두개의 건물이다. 이 건물들은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어 실제로 들어가서 보기는 어려웠다. 옆에서 모습이라도 보고 싶으면 거북이 슈퍼 쪽에 있는 색안경이라는 안경집 오른쪽 두개의 건물을 찾으면 된다.
3) 창화당(옛 수련집)
시대가 바뀌고 땅값이 오르다보면 예전 추억의 집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가 창화당 자리에 있었던 수련집이다.
2018년까지만 해도 맛있는 김치찌개, 동태찌개 백반을 3,500원에 팔던 이 집은 지금은 유명한 만두가게인 창화당으로 바뀌어 있다. 당연한 흐름이므로 잘못된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한옥마을의 모든 공간들이 이런 아쉬움의 순간들과 아쉬워질 순간들이 얽혀있을 것이다.
8. 고려시대길과 조선시대 피맛길, 백순주 명창의 집, 게이거리
창화당 골목으로 쭉 들어오면 많은 고기집들이 보인다. 좀 더 걸어가 갈매기 집 '미'에서 부터 시작해보자.
'미'는 종로 5가역 6번 출구로 향한 길에서 바라보면 2개의 길이 나뉘는 갈림길에 위치한다. 재밋는 것은 왼쪽 길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해왔던 골목길, 오른쪽 길은 조선시대의 피맛길이라는 것이다. 이 두개의 골목길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걸었던 길인 것이다.(지금은 없어진 종로1가의 피맛길과는 다른 길이다)
1) 고려시대길
고려시대 길은 돈의동 갈매기살 골목이라고도 불린다. 많은 갈매기살 전문점들이 위치해있다.
고려시대 길로 걷다보면 중간에 '한옥'이라는 고깃집이 보인다. 정말 특색없고 앞으로도 갈일 없을 것 같은 이곳은 박녹주 명창 선생이 살던 집이다. 익선동은 과거 김억, 나혜석, 홍명희 등 유명인이 살던 곳으로 유명 기생이였고 후에 무형문화제가된 박녹주 명창 선생은 이 집에서 살았다.
아쉽고 어이 없게도 그런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몇번이고 확인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박녹주 선생은 소설가 김유정과의 러브스토리로도 유명하다. 정확히 표현하면 김유정에게 스토킹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학생이였던 김유정은 쫓아다니고 연서를 보내고 혈서에 협박에 납치시도까지 했다. 이런 대학생의 풋내나며 무서운 집착같은 사랑은 너무나 유명인이였던 박녹주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 러브스토리는 끝이 난다.
박녹주를 쫓다 건강상의 이유로 대학을 중퇴한 김유정은 글을 쓰기 시작하고 '소낙비'가 당선되며 작가가 된다.
2) 조선시대 피맛길
다시 돌아와 피맛길로 걸어본다. 걷다보면 아까 본 박녹주 명창의 집이였던 '한옥'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가 보인다. 대문을 통해 보니, 이제야 여기가 박녹주 명창 생가였다는 흔적이 보인다.
정말 성의없게 붙여진 종이 몇장이 그녀가 여기 살았다는 흔적인가보다.
피맛길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0여 년전 이 길을 같이 걷던 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 게이 거리야"
????????? 뭔 소리냐고 되물었지만 걷는 내내 남남커플, 바에 가득찬 남남, 거리 전체에 남자 비중이 90%가 넘는 모습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뭔가 숙연해졌다. 지금은 성소수자 친구들도 있고 거부감도 덜 하지만, 그땐 게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어 거리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지만, 이후 여러번 이곳을 방문하며 호기심 반으로 걸어보곤 했었다.
알고보니 이 거리에 그런 가게들이 많긴 하지만, 이 부근 전체에 그들의 아지터가 퍼져있었다. 부근의 중국집이 24시간인 것도 이곳에 보인 사람들이 자꾸 시켜먹어서란 소문도 있다.
9. 포장마차 거리
'미'를 등지고 나오면 5호선 종로3가역 6번 출구가 보인다. 이곳은 저녁이 되면 많은 포장마차들이 문을 연다.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술은 또 다른 느낌이다. 뭔가 삶의 애환이 더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가끔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곤한다.
물론 맛이나 가성비가 좋다고 말은 못하겠지만, 어쩌다 한번 분위기를 맛보러 온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게이거리를 찾은 많은 게이들도 여기서 술을 마신다고 하니 이상한 눈초리는 보내지 말고 그런가보다 하며 자기 술잔을 즐기면 된다.
10. 쪽방촌
길을 건너 3번 출구 레몬트리 호텔 뒷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일명 쪽방촌이라 불리우는 좁은 골목 안에 다닥다닥 작은 집들이 붙어 있는 곳이다. 정확히는 익선동이 아닌 돈의동의 쪽방촌.
지도를 확대해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된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이곳은 종각역, 서울역 등에 집없는 노숙자들이 되기 전 단계라고 까지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쪽방 갯수가 781개나 된다고 한다. 94년도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밀집된 곳에 화장실이 3개뿐이였다니 어떤 곳인지 느낌이 온다.
사회적인 아쉬움은 뒤로하고 10평 남짓한 작은 방들이 가득 붙어 있는 이곳의 탄생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 이곳은 땔나무와 숯을 팔던 시탄 시장이였다고 한다. 6.25 이후 이곳은 윤락가로 변했는데 좁은 지역에 많은 방이 생겨난 이유가 더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라는 의견이 있다.
다른 의견은 일세 방을 많이 만들어 수입을 올릴려고 했다는 것인데 앞의 의견에 좀 더 심증이 간다. 원래 종삼(종로3가)는 대표적인 윤락가였고 한참때는 동으로는 원남동 서로는 낙원동과 돈의동까지 확장된 윤락가였다고 하니 이것에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또한 다음에 설명할 한약방들과 연관지어봐도 앞 의견에 더 동조하게 된다.
이곳을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옆 관광지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매우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혼자 어딘가를 찾는 코스프레를 하며 돌아다닌 20분의 시간동안 10여명에게 공격적인(어쩌면 방어적인) 눈초리를 받았으니 여성 혼자라면 돌아다니기 무서울 곳이다.
다행히 이곳은 시의 관리 대상인지 정비도 되고 있고, 도움터도 만들어진 것 같아 보인다.
11. 한약방 춘원당
쪽방촌 골목을 헤매다 나오면 춘원당 한약방이 보인다. 170여년의 역사와 7대째 가업 계승을 자랑하는 역사 있는 한의원이란다. 그래서인지 한방 박물관도 있다.
이곳에는 춘원당 말고도 많은 한약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약방들이 많아진게 윤락가가 생겨난 후라고 하니 아마도 성매매 여성들을 치료해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8년 서울시의 '나비 작전'으로 이곳 윤락가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때 서울시가 사용했던 작전이 흥미롭다. 순찰돌던 공무원들이 손님들의 이름이나 주소를 묻거나, 밝은 정등을 여기저기 켜놓는 등 방해공작을 폈다고 한다. 이때 성매매 여성들과 포주들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미아리 텍사스'라고 한다.
이후 이곳 쪽방촌은 일용직 근로자나 갈 곳없는 이들의 터전이 되었다고 한다.
12. 돌아오는 길에..
다시 탑골 공원쪽으로 오다보면 위에서 말한 송해길에 접어든다. 그때 파고다 타운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작은 상가인데, 이곳을 주목할 점은 원래 파고다 극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극장은 과거에 들국화나 부활같은 밴드의 공연장으로 활용되기도 한 한국 락음악의 산실 같은 곳이고, 1989년 3월 새벽 3시 30분, 기형도 시인이 죽은채로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시대의 흐름에 밀려 지금은 파고다 고시원이 되어버렸지만, 이 부근을 지나갈 때 잠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