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구절10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중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실려있는 시이다.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하지만 정말 저쪽편에서 허공에 떠있는 못을 볼 수 있을까.. 어둠은 암흑이다. 그 속에서는 보이는 것은 없다. 그쪽에선... 깊어지는 못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을 가장 얽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둘에서 벗어날 때 가장 큰 자유를 느낀다. 비행기를 타고 공간의 억압에서 벗어난다. 밤샘 카페에서 잠을 자야할 시간에 깨어있는다. 그리고 어두운 밤에는 손만 뻗어도 벽에 손이 닿는 작은 방이 한없는 우주공간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밝은 곳에서 사는 사람이 느끼는 자유일뿐. 원래 어두운 곳에 있었던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대로 억압일뿐..... 2017. 2. 7. 돌이킬 수 없는 것 - 보들레르 I하늘에서 쫓겨나 [천국]의 어떤 눈도미치지 않는 진흙의 납빛[지옥]에 떨어진하나의 [관념], 하나의 [형태], 하나의 [존재]; 무모한 나그네, 한 [천사],기형적인 것에의 사랑에 홀려엄ㅊ어난 악몽 밑바닥에서수영하는 사람처럼 버둥거리고, 어둠 속에서 빙빙 돌며미친 사람처럼 노래하고,거대한 소용돌이 거슬러분투한다, 침울한 번뇌여! 파충류 가득 찬 곳을 빠져나오려고빛을 찾고 열쇠 찾으며쓸데없는 암중모색에 빠진 불행한 자; 음습한 깊은 바닥 냄새 고약한심연의 가장자리에서인광 번뜩이는 커다른 두 눈으로밤을 더욱 어둡게 하고, 저희들만 비추는끈적끈적한 괴물들이 망보고 있는난간도 없는 영원한 계단을등불도 없이 내려가는 천벌받은 자; 수정의 덫에 걸리듯극지에 갇혀어떤 숙명의 해협에서 이런 지옥에떨어졌는지 알아내려고.. 2013. 6. 12. 확산 - 이장욱 그는 아주 빠르게증발하였다.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그가 당신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그의 손목은 지워졌다.그의 팔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당신은 한일전 승부차기에 대해 말했다. 그의 다리가 지워지고 그의 허리와그의 어깨가삭제되었다.그의 입술이 사라지자당신은 침착하게 대화의 절정에 도달했다그는 익숙하게 형태를 버렸으며창밖으로 마른눈이 내렸다. 당신에게 스며드는 그를당신은 식사 중에당신은 은행에서당신은 섹스에 몰입하다가당신은 살인의 충동에 시달릴 때 깨닫는다.당신은 조간신문의 경제면에 대해당신은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에 대해당신은 당신에 대해갑자기 눈물겨웠다.당신은 무한히 퍼져가는그를 생각하였다.그가 당신은 이해하여당신의 어깨를툭,치고 지나갔다. 2013. 6. 9. 물속에서 -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 2013. 6. 8. 왈츠 - 최규승 여자는 나무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까맣게 빛나는 오후눈을 감는다한 박자 쉬고 고개를 돌린다여자의 배경이 흐려진다틀 밖을 응시하는 여자아무도 모른다사진을 찍는다여자의 사진이 지워진다흐려진 배경이 모니터 속에서 선명해진다또 한 박자 쉬고 여자의 발걸음이 흐른다나무의 그림자 발걸음을 붙든다그림자 위로 흘러내리는발걸음 그림자 지워진다한 남자가 지나간다모든 노래를 벽 위에서 자란다나무는 여자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 2013. 6. 8. 멜랑꼴리 호두파이 - 황병승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꿈 속에서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나도 모르게 울었다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머리빗, 단추 한알, 오래된 엽서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뒷마당에 꾹꾹 몯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며. 해질 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오늘은 달고 맛 좋.. 2013. 6. 8. 플랫슈즈 - 최규승 플랫 슈즈 조혜은 길게 이어지는 약속을 좋아해요 색다르게 부푼 아침 소멸하는 뒤꿈치를 따라 가벼워진 굽의 무게로 자꾸만 흐려지는 당신의 무늬를 바닥 가까이 흩어 놓는 일 뜨거운 무늬로 얽혀 있는 하루 따뜻한 상처들로 채워진 발바닥에는 무지개 송어처럼 예쁜 이름을 숨기고 부드러워진 뒤꿈치를 따라 지워진 문항의 뒤를 밟는 일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음 계절로 사라지는 남자들 자꾸만 낮아지는 여자들을 따라 눈이 내리기 전에 뒤돌아 가요. 구두코에 올린 커다란 통증 같은 장식들은 떼어버리고 소멸하는 뒤꿈치를 따라 2013. 6. 8. 빙하아래 - 김선우 빙하 아래김선우 1.바람벽 벼랑 위홑겹 줄지어 늘어선 집들 허물어지겠구나 목을 쳐다오허물어지겠구나 목을 쳐다오 내려앉고 있는 얼음 절벽지붕을 얹고 있는 이들 있었습니다 얼음 속의 인골들수수수수만년 전 처음 걸음을 배운, 내 목구멍이 언제부터저기에 걸려 있었을까요 2 알고 있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당신을 안고 있었어요당신을 안고 내가 죽어 있었어요당신을 안고 죽은 나를 안고당신이 죽어가던 그때처럼몸 갚아드리기에 좋은 벼랑입니다 3 뜨거운 온천물에 사는 물고기 있다고 들었습니다염도가 너무 높아 아무것도 살 수 없는소금 호수에 사는 민물고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그러니 뱃가죽 밑에 짓푸른 이끼를 기르고 있는얼음물고기인들 왜 없겠어요 2013. 6. 8.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강성은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 2013. 6. 8. 환상의 돌림병(슬로보예 지젝) 중. 변기에도 이데올로기가 있다. 대변이 사라지는 구멍이 앞쪽에 있어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독일 식 변기는 독일 특유의 반성적 철저함을, 구멍이 뒤쪽에 있어서 대변이 신속히 사라지는 프랑스식 변기는 프랑스 특유의 혁명적 조급성을, 변기에 물이 가득차 있어 대변을 볼 수는 있지만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영국식 변기는 독일 식과 프랑스 식을 종합한 영국 특유의 온건한 실용주의를 보여준다. (각주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체위의 이데올로기라고 왜 없겠냐며 묻는다.) 2013. 3. 16.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