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 평론을 읽다보면 디오니소스적인 것,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읽는 나도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과연 사용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 사용법이 모두 통일된 것인지 궁금하다. 이 둘은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메타포적 단어이다(시작은 아닐지라도). '비극의 탄생'을 아주 간략하게 읽어보고, 이 둘의 의미와 니체 초기철학을 알아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결론부터 알아보면, 니체가 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에서 시작해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지지로 끝낸다.'
다시 말하면
'쇼펜하우어 철학의 세계관에 입각해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해명하고, 이어 바그너 예술을 그리스 비극의 부활로 해석하고 찬양한다.'
좀 더 멋드러지게 풀어보면
"참혹한 혼돈의 삶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는 힘과 그것을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는 힘을 통해 살만한 삶으로 바뀐다. 이를 행했던 것이 그리스인으로 그것이 그들의 위대함이다. 그러나 현실은 과거로 회귀할 수 없으므로 현실에서는 아폴론적 비극시인이 아닌 아폴론적 음악가가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1. 그리스인의 명랑상과 비극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에게 삶이란 경악스러운 것었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의 삶이란 삶이 불가능한 질서가 없는 혼돈의 세계인 맹목적 의지의 세계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진리를 알기 위한 것이였고, 진리를 알게되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되는 우울한 철학이였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 철학이란 진리를 알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살기 위해 하는 것으로, 진리를 알았더라도 다시 진리를 잊고 돌아서야하는 것이였다.
이것을 행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인으로 니체는 이를 '그리스인의 명랑성'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인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양가성을 알고 있는 것과, 생이 충만하게하는 기술인 예술을 알고 있었기에 위대하다. 이러한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비극'이다.
2. 디오니소스적인 것 vs 아플론적인 것
디오니스소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은 명백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에 대응한다. 세계의 본질인 맹목적 의지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그 의지가 드러나는 표상은 아폴론적인 것이다. 이를 그리스 비극으로 보자면 그것은 언어와 음악으로 언어는 아폴론적인 것으로 연극(각본)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음악은 디오니소스 적인 것으로 그리스 비극의 공연에는 언제나 합창단이 있었고, 그들의 음악이 그리스 비극의 두번째 축이다. 니체는 여기서 음악, 곧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그 본질을 예술로 성립시켜주는 아폴론적 형식이 연극이라고 말한다.
(1) 디오니소스적인 것
생의 진실은 살수가 없는 영역, 혼돈의 세계, 자연의 세계이다. 또한 생이란 사이렌의 노래처럼 따라가면 돌아올 수 없으나(자기존재성 상실), 엄청난 도취의 힘이 있는 것이다.끊임없는 흐름이 있고, 끊임없는 모순이 있고, 엄청난 도취력이 있는 자연이란 음악과 유사하다.
그러나 춤과 노래의 세계가 그것을 재현하고 있다면 이미 거기서 심미적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를때, 프로메테우스가 간을 쪼일때, 즉 살 수가 없는 생이 현신할 때, 합창단이 노래를 시작한다. 즉 음악이 있다. 음악의 기원은 자연에 있을지 모르지만, 음악정신의 기원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있다.
(2) 아폴론적인 것
간단히 말해 오이디푸스와 소포클래스의 구분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지적능력에 도취되어 스스로 몰락해가는, 인간의 지성이 극에 달했을 때 몰락하는 존재라면, 소포클래스는 이러한 오이디푸스를 무대로 올려 그 세계를 관객에게 보여주며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 이야기해주는 존재이다. 즉 아플론적인 것은 혼돈의 세계를 드라마로 만들어주는 조재. 혼돈의 요소들을 구성하여 연결해주는 존재이다.
관객들은 몰락하는 오이디푸스를 보며 몰락의 끝에 코러스의 음악을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카타르시스는 황홀함, 해방감, 여기서 관객들은 생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가상을 맛본다.
참혹한 혼돈의 삶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힘(디오니소스적인 것)과 그것을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는 힘(아폴론적인 것)을 통해 살만한 삶인 아폴론적 가상으로 변화한다. 그리스인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이것이 그리스인의 현명함이자 그리스인의 우아한 명랑성이다.
3. 디오니소스적인 것 vs 소크라테스적인 것
참혹한 혼돈의 삶이 아폴론적 가상으로 변화하여 살만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아폴론적인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이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죽고 소크라테스적인 것이 승리했다. 음악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리정신, 음악 정신의 그 도취적 흥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차가운 앎의 의지, 바로 이러한 소크라테스주의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목을 졸라고 결국엔 그리스 비극을 죽여버렸다.
소크라테스는 니체에게 두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첫번째는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죽여버린 현대성(당대성)의 조상으로 살아있으면서 살아있지 않은 인간들, 똑똑하지만삶을 모르는 인간들을 만들어 내어버린 존재이다. 이성중심의 주지철학으로 변환시켜버려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망각시키고 아폴론적인 언어만 추구하게 만들어 버린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스인의 현명하고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또 하나의 얼굴을 지닌다. 이를 니체는 이렇게 표현한다.
"음악하는 소크라테스"
이미 주지적 인간이 되어버린 현실은 피할 수 없고, 현실에서 그리스 모델은 바뀌어야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음악하는 소크라테스가 필요하다. 아폴론적 비극시인이 아닌 그 자리에 아폴론적 음악가가 들어서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그너이다.
"바그너는 신이 없는 시대에 여전히 살아 있는 비극시인이다."
"어느날 독일 정신은 거대한 수면을 취한 후의 상쾌한 아침에 자신이 깨어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는 용을 퇴치하고 간악한 난쟁이들을 섬멸한 후 브룬힐트(니벨룽의 반지 여주인공)을 잠에서 깨울 것이다. 그러면 보탄의 창도 그의 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4. "비극은 음악정신으로 부터 태어났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전편에 걸쳐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된다"라는 문장을 두 번 반복한다. 이 문장이야말로 니체가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였다. 삶은 근원적으로 비극적이며 그 비극성을 견딜 수단은 예술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쇼펜하우어적 의지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삶의 욕망을 찬양하는 것, 니체는 그런 삶의 태도를 그리스 비극 정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극은 '음악정신으로부터' 태어나싸. 음악정신이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다. 아무리 혹독한 고통도 디오니소스를 죽이지 못한다. 죽음을 견디고 디오니소스가 부활하듯이, 그리스 비극 속에 담긴 그리스의 정신은 그렇게 삶을 의욕하고 삶을 찬양한다고 니체는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