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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리뷰

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

by 진욱. 2021. 3. 3.

“아니 에르노라는 문학”
누가 뽑은 표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문구를 본 이후로 언젠가는 아니 에르노 책은 언제고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이름이 곧 문학의 장르가 될 수 있는지.
그러다 고른 작품이 <<사진의 용도>>였다. 소재가 너무 매력적이다. 연인과 함께 사랑을 나눈 다음 날 흔적, 특히 벗은 옷들을 찍은 사진들을 보며 쓴 글들. 처음엔 그냥 재미난 소재라고 생각하고 읽었지만, 이 글은 그렇게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다.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 판정을 받는다.  이제 그녀와 연인 마크 마리는 그녀의 죽음까지 함께 셋이 하는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그녀는 그전부터 생각해왔던 연인과 섹스가 끝난 후 그들이 벗어놓은 흔적들을 찍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보며 완성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에게 보여 주지 않고,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각자 자유롭게 글을 쓰기로 합의한다. 이 책은 그중 14장의 사진에 대한 그들의 글이다.
 
어떤 사진도 지속성을 나타내진 않는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에 가두어 버린다.  짧은 순간, 아니 가두어진 순간은 시간성을 주는 연속성의 배열에 배치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같이 찍고 바로 확인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찍고 사진관에 현상을 맡기고 가져와야 하는 유예 시간이 있는 작업이다. 시간의 유예는 어떤 기억은 지울 것이고 어떤 기억은 창조해 낼 것이다.

그들의 사진은 순간이자 영원을 담고 있고, 그것을 그들은 유예기간이 지난 후 기억을 더듬어 해석해낸다. 사진을 찍을 때는 사랑이 지나간 시간을 포착하고자 했지만, 마치 정물화처럼  중요한 것은 형태와 색깔뿐이며 남아 있는 기억은 희미하고 보이는 것은 형태와 색깔뿐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근본적으로는 부재이다. 그 부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닌,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것은 그저 흔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거기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들을 보게 된다. 이전에 일어났던 일과 도중의 일, 그리고 그 직후를. 그 모든 것은 사진에는 존재하지 않는 부재한 것들이다.

14개의 사진에 대한 글들에는 절대적인 진리나 절대적 가치관은 없다. 부재를 대상으로 한 글에 어떤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글에서는 사랑을 찾으려 했다가 다른 글에서는 ‘그는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을 피하는 방법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사진이 사랑의 현실감을 잃게 한다고도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엔 그냥 재미난 소재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50페이지의 짧은 이 책에는 머무르는 소중한 ‘순간들’이 사라져 ‘부재’가 될 것을 알면서도 잡아보려고 하는 죽음을 곁에 둔 커플이 행하는 최선을 다한 다양한 노력의 모습들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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