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작품을 처음본 것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반 고흐전’을 할 때 이다.
너무 많은 관람객들은 내 정신과 귀를 괴롭혔고, 화려한 색채는 내 눈을 피곤하게 했으며, 머리 속에서는 고흐에 대한 너무 많은 사전지식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2전시장(맞나?) 옆에 있던 상설전시장을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작가 천경자(千鏡子 1924 ~ ).
찐득찐득한 유화물감의 무거움이 아닌 한지에 채색물감을 조심스레 덧발라 그린 그녀의 작품은 이래저래 지친 내 눈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유화같은 질감은 없지만 종이 깊숙이 스며든 물감때문인지 그녀의 작품은 오래보아도 질리지않고 볼수록 정이 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런데, 난 왜 그녀의 작품이 상설전시장에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개인전 한번 여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슈가 될 수 있는 거장인데.. 천경자 화백에 대해서 찾아보던 중 그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991년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인도 위작논란’(난 이때 뉴스에서 미인도란 이야기만 듣고 신윤복이야기인지 말았다OTL)이 그 원인이였다.
위작 논란이된 미인도
국립현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 '경자 1977', 속칭 미인도라는 채색화 한폭이 문제의 중심이다.
천경자 화백은 91년 4월에 "내 작품이 아닌 가짜"라고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박물관측에서 '진짜'라고 맞받아치면서 논쟁이 확대된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어요.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있나요?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 머리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표시연도도 내 것이 아니예요."
68세의 천경자 화백은 세상과 언론을 향해 울부짖었지만 오히려 나이든 노인이 정신이 오락가락해 헛소리한다는 이야기만 듣는다.
국립현대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측은 소장경위가 확실하다는 점, 전문가가 진품으로 판장했다는 점, 현미경분석, 적외선, X선 촬영등으로 진품이 확실하다가 말했고 세상은 이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평생 그림만을 사랑했던 한 여인은 이미 몸과 마음이 망신창이가 되었고 결국 91년 4월 7일 절필을 선언해버린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채 가짜로 우기는 풍토에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거기다 99년 7월 미술품 위조사범으로 검거된 권모씨가 미인도로 알려진 그 그림을 그린 것이 자신이라고 선언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정협회의 감정 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자, 감정위원들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실수가 있을 수 있다’며 한 발 물러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8년 전의 감정을 뒤집을 만한 근거가 없다’며 일축했다.
물론 나는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만은 안다. 결국 상처받은 화가의 자존심은 끝내 회복되지 않은 채 사건은 유야무야 마무리되었고 그녀는 너무도 사랑했던 그림을 그만두어버렸다는 것...
만약 천화백이 미술계의 주변에서 머물지 않고 권력층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한편의 영화같은 삶을 살았던 작가 천경자화백의 그림세계를 살짝 살펴보자.
“나는 아버지로부터 유학 건으로 꾸중을 듣다가 다듬잇돌 위에 앉아 ‘히히 하하하’ 미친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마늘쪽처럼 세모진 눈을 하고 나를 슬프게 쏘아보셨고 미친 시늉을 하던 나는 정말로 울음이 터져 큰 소리로 통고해버렸다. 어쨌든 그 슬픈 연극으로 나는 일본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 『탱고가 흐르는 황혼』, 천경자
생태, 1951, 종이에 채색
일본유학 후 한국화단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의 길을 걷던 그녀는 6.25동란이 일어나고 가난, 동생의 죽음, 결혼의 실패 등 시련을 맞는다. 그녀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뱀도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사랑한 연인이 바로 35세의 뱀띠였던 것이다.
"죽을 것처럼 숨이 막히던 그 여름에 뱀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고 몸서리치는 뱀을 그리는 동안 인생의 고통 하나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뱀이란 소재는 그 자체가 혐오감을 줄 뿐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배척의 대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뱀이라는 소재는 그림의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기껏찾자면 성서의 천지창조때 아담에게 사기를 친(-_-;;) 뱀 정도나 가끔 나타나는 정도일까...
하지만 천화백에게는 뱀은 그런 고정관념을 벗어난 자신의 고통을 막아주는 수호물로 나타난다.
내가 죽은 뒤, 1952, 종이에 채색
힘들었던 시기 광주 도립병원에서 구한 인골을 보며 그린 그림 <내가 죽은 뒤>
물가의 조용한 지면의 하얀 인골이 불교의 피안세계를 상징하는 팔나 자홍색 피안화의 꽃대와 저승사자같은 호랑나비가 나타난다. 이 작품은 불쌍하게 처녀로 죽은 동생 옥희의 극락왕생을 바라며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1954년 그는 홍익대학교 동양학과 교수가 된다. 이 시기부터 그녀는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어 새로운 작품생활을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도입한 것이다.
정, 1955, 종이에 채색
이 작품에서 그녀는 이전 사실주의 화풍을 약화시키고 주황과 적색이 가득한 색채가 밝고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낸다.
이 작품은 크게 잡은 구도의 대담한 주제설정, 강열한 조형의지를 인정받아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받는다.
전설, 1959, 종이에 채색
환, 1962, 종이에 채색
원, 1963, 종이에 채색
비 개인 뒤, 1962
청춘의 문, 1968, 종이에 채색
자살의 미, 1968, 종이에 채색
1968년작 자살의 미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꽃힌 믹서 속에 수선화가 위태롭게 들어가 있다. 행복한 일상에서 시도했던 초현실적인 화풍이 끝나가고 있음을 예고한다. 칼날 위의 선득한 위태로움과 슬픔, 회색이 가미된 보라색과 흰색, 군데군데 드러나는 붉은 색은 이전 작품에서 보이던 달콤한 환상이 아닌 불안함을 드러내준다.
이를 끝으로 그녀는 한을 벗어나려는 해외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 기행, 1973
길례언니, 1973
마아가렛 미첼 생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리비아 사막, 1974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고, 1974>, <6월의 신부, 1977> 등에는 천경자화백 작품의 상징인 꽃, 여인, 뱀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뱀에대해서는 간단히 앞에서 이야기했고, 여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자신이 여인인 것도 이유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恨)때문이라 하겠다. 그 시절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은 한을 지닌 존재가 누구였겠는가...바로 여인... 한을 화폭에 담고 싶어했던 천화백이 여인을 소재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온몸 구석구석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우지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꽃. 그녀에게 꽃이 없음은 곧 현실에 대한 공포를 막는 무기의 상실이다. 강력한 색채에 원초적 화풍을 더해 자신만의 인공낙원은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미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듯하다. 실제로 그녀는 전시회에 종종 꽃다발을 들거나 머리에 쓰고 오기도 했고, " 그림 속에 여자가 꽃을 머리에 얹은 것은 한이 많아서다"라고 하기도 했다.
워스턴 사모아 아피아 시
인도갠지스 강에서
아열대1
초원2, 1974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대상의 융합보다는 뚜렷한 독립성을 강조하고 채색의 개별성도 강조한다.
폭풍의 언덕, 1981
노오란 산책길, 1983
아라만다의 그늘, 1985
황금의 비, 1982
그라나다 시장, 1993
소녀와 바나나, 1993
그라나다의 흑인자매, 1993
우수의 티나, 1994
황혼의 통곡, 1995
러시모어 국립공원, 1995
자신의 한을 자신도 어쩌지 못한 ... 그래서 여행이라는 도피아닌 도피를 선택했던 작가. 천경자.
우리는 그녀에게 또다른 한을 심어준건 아닐까?
난 그녀가 다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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