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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구절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by 진욱. 2013. 6. 8.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강성은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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