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앞서간 천재, 이상.
화가나, 시인, 소설가등 예술가들은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독특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작품세계에 너무 빠져들어서인지, 그 성격때문에 그런 작품이 나오는 것인지는 닭과 계란 논쟁 같은 것겠지만, 보통 유명한 예술가 중 정상적인 삶을 산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도 남부럽지 않게 특이하고 힘든 삶은 산... 세계 속에 내놓을 수 있는 천재가 한명 있다.
그의 작품은 그 이후에 나온 포스트구조주의와 라캉의 정신분석을 갖고서야 비로서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 나갔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다는 소리는 ... 결국 그 시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의 이름은 이상(李箱, 1910 ~ 1937)이다.
<남부럽지 않은 것은 이 분도 마찬가지?>
겨우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이 천재는 몇편의 시와 한편의 동화만을 우리에게 남겼지만... 그가 남긴 몇편의 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듯하다. 아니,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씩 이야기해보자.
1934년. 오감도(烏瞰圖) 발표되다..
이상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발표한다.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시이니..그당시에는 어찌되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원래는 3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나, 공무국에서는 "조감도(鳥瞰圖)와 오감도도 구별 못하는 놈에게 시를 쓰게 만드냐" 는 지탄을 받기도 하고, 각종 욕설이 난무하는 비난을 받기도 하면서 15회로 중단하고 말았다..
요즘이라면.... 오감도 중단을 위한 아고라를 만든다던지.... 환상적인 댓글들이 난무했을지도...어쩌면 플랜카드가 걸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는 이런 몰지각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신기한 것은 조선중앙 학예부장이였던 이태준은 독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15회까지 연재를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이상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조감도가 아닌 오감도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적 기호의 의미는 사물과의 일대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와 기호 사이의 차이에 의해 형성된 관계에 의해 그의미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언어 기호자체가 확정적인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기호 사이의 관계에 기초한 언어 기호의 의미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생각하던 바와 다르게 언어에서의 의미가 불안정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소쉬르의 언어에 대한 해석은 포스트 구조주의에 까지 영향을 끼친다.
꿈의 열쇠, 르네마그리트
<기호와 의미는 일대일 관계가아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상은 독자들에게 조감도와 오감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작가라고 비난받았었다. 하지만, 오감도라는 제목은 소쉬르의 언어관으로 해석해볼 때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새조(鳥)와 까마귀오(烏) 사이에는 단지 획 하나(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 하나의 차이에 의해서 그 기의에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새 조자와 까마귀 오자가 각각 의미하는 것은 그 글자들이 지시하는 지시 대상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보다는 단지 이 두글자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나오는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바로 현대예술의 미학과 연결된다.
잉가르텐은 텍스트는 오직 독자의 구체화작업을 통해서만 작품으로 탄생한다고 이야기 한다. 따라서 독자에 따라 텍스트의 '내용'도 달라지게 된고 이러한 불확정성에 작품은 오히려 미적효과를 갖을 수 있다는 것이 현대예술의 미학 중 하나이다.
오감도란 제목은 이상이 자신이 직접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테니 독자들이 직접 의미를 찾으라고 하는 선언인 것이다. 획 하나로 의미가 바뀜을 이용하여 그는 기호와 의미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기호와 의미 사이의 관계가 절대적이라고 여겨질때는 작가는 신과 같은 존재로 작품의 모든 의미를 확정하였으나, 이제는 작가는 단지 의미가 없는 기호만을 보일 뿐 그 의미를 확정할 권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빈기표들만 있는 시에서 독자들이 직접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아버지 죽이기
앞에서 말했듯 이상의 작품은 독자의 해석에 맡겨야할 것이다. 그말은 지금하는 포스트의 해석 역시 수많은 해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상은 어린시절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출생시 그의 본명은 김해경. 허나 그의 큰아버지인 김연필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그는 큰아버지집으로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24세까지 살게된다. 또한 큰아버지 김연필은 재혼을 해 이상또래의 딸 문경을 데리고 들어온다.
이상의 문학세계는 이러한 복잡한 어린시절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실은 김해경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이상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데에도 들어난다. 그의 이상이란 필명은 작가들이 멋스럽게 사용하는 필명이 아니다. 공사판을 전전할 때 그의 이름을 모르던 일본인들이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성씨인 '이'와 타인을 지칭할때 부르는 '상'(진욱상~이런것)을 붙여 부른 이름일 뿐이다.
어린 세계의 영향을 이해하는데에는 라캉의 이론이 나름 잘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은 인간의 사적인 영역을 상상계(the imaginary)로, 공적인 영역을 상징계(the sysbolic)으로 나누었다. 문인이 글을 쓴다는 것은 지극히 공적인 행위라고 할 수있다. 이 공적인 영역, 즉 상징계는 아버지의 이름(Name of Father)의 영역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래 제도, 규칙, 규범이 만들어져 자신이 원치 않더라도 그 내부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이란 의미는 진짜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는게 아닌 사회적 통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아마도 이상은 자신의 작품 날개에서 표현했듯 자신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이러한 사슬에서 벗어나날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
오감도라는 제목역시 이러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조감도라고 말해야하지만, 그는 오감도라고 표현해버린다. 조감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옳은 행동이지만 사회적 관습 자체가 아버지의 법이므로 이상은 거기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오감도 2호>
위에서 설명한 특징들은 오감도에서 잘 드러난다. 오감도를 읽다보면 우선 눈에 띄이는게 띄어쓰기와 구두점의 무시이다. 띄어쓰기나 구두점은 글쓰기에 있어서의 규칙이나 규범이다. 즉 아버지의 법인것이다. 이상은 이렇게 규칙을 어김으로써 오감도에서 아버지 죽이기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 이야기는 아니다>
시 내부의 아버지는 졸고 있다고 한다. 존다는 것은 잠을 잔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자신의 법을 집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자신의 권위를 상실해버린 아버지 대신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누른다.
이러한 사실은 시의 내부에 등장하는 '나'와 '아버지'란 단어의 빈도수에서도 드러난다. 오감도 제2호에 드러나는 '나'는 전체 18회, '아버지'는 17회. 이상은 이렇게 상징적 측면뿐 아닌 수적 측면까지 아버지를 누르고 있다.
세상에 대한 교묘한 반기
오감도 제 1호를 보자.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때 일본은 서양의 과학과 산업을 받어들여 그를 바탕으로 식민지배를 하고 있었다. 서양의 과학과 산업은 이성중심주의를 대변하는데 이것은 인과관계와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인과관계와 이분법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우선 시의 처음에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라는 부분과 마지막의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나하여도좋소"라는 모순되는 두 문장에 중간의 인과관계가 빠져있다
또한 시작부분에서 제 1, 2, 3,...인의 아해가 무섭다고 말한다. 즉, 13인의 아해는 모두 무서워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분이모였오" 라며 무서워하는아이와 무서운아이로 이분지어서 말하고 있다. 이상은 이렇게 인과관계와 이분법을 전복시켜버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라도 좋소, ~라도 적당하오 같은 표현을 씀으로써 이성중심주의의 이분법에서 드러나는 특징인 우선권을 무시해버림으로써 그 효과를 더한다.
또한 앞의 오감도 제 2호처럼 제1호 역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아버지의 법에 대한 폐기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법이란 무엇일까? 시대적으로 이 시기는 일제제국주의 시대이다. 아버지의 법이란 바로 일제제국주의 시대의 규칙과 규범인 것이다. 이상은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박제되어 버린 천재. 이상이여..
지금까지 이야기했듯 이상은 너무나도 앞서 나가버렸다. 또한 그의 꿈을 펼치기에 일제제국주의 시대는 캄캄한 감옥이였다. 시대와 사회에 갇혀버린 이상은 박제되어 버린 천재였던 것이다.
그의 천재성이 이제라도 다시 평가받고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이상문학상이라는 이벤트를 열고는 있지만
그래도 좀 더 이상을 세계로 알릴 수는 없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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